임춘의 본관은 예천醴泉이며,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이다. 아버지는 상서尙書를 지낸 임광비林光庇이며, 예천 임씨의 시조이며 이인로李仁老 등과 교유하였다.
고려 의종 무렵에 태어나 20세 전후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으면서 공음전功蔭田까지 탈취당하고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피신하여 약 7년간 유랑생활을 하다가 30대 후반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6권 2책의 목판본으로 1713년(숙종 39)에 14대손 임재무林再茂에 의해 중간되었다. 초간본은 저자가 죽은 지 20여 년 뒤에 그의 지기知己였던 이인로李仁老가 유고를 수습하여 편집하고 서문을 지어 1222년(고종 9)에 처음 간행되었으나 천하지는 않는다. 책 머리에 최석정崔錫鼎 조태억趙泰億의 중간서가 있고, 이인로의 편집서와 최우崔瑀의 후서가 있으며, 책 말미에 신유한 임재무가 지은 발문이 있다.
권1∼3에 고율시古律詩 144제題가 있다. 시는 절구 율시보다 장시長詩가 많고 신란 이후 30세 후반에 요절하기까지 극한적 궁곤 속에서 신음했던 그의 목소리는 〈기우인奇友人〉 〈동일도중冬日途中〉 〈차우인운次友人韻〉 〈모춘문앵暮春聞鶯〉 등은 무신란 이후 불우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비통함 좌절감 등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장검행 杖劍行〉은 1174년(명종 4) 그가 유랑생활을 하면서 지은 작품으로 그의 시세계를 한 눈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권4에는 서書 18편이 있다. 편지는 〈답박인석서 答朴仁碩書〉 〈상형부시랑서上刑部侍郞書〉 등과 같이 지인들과 나눈 글로서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도움을 청하거나 감사의 뜻을 보내는 내용, 〈여조역락서與趙亦樂書〉 〈여담지서與湛之書〉 등과 같이 자신의 재주와 학문 그리고 포부를 피력하는 내용 등이 있다.
권5에 서序 6편, 기 6편, 전傳 2편이 있다. 〈중추회음서中秋會飮序〉 〈송이미수서送李尾叟序〉 〈일재기逸齋記〉 〈족암기足庵記〉 등에는 군자의 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내용 및 타락한 세태에 대한 비판이 나타난다.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은 우리 문학사상 가전작품의 효시가 되는데, 술과 돈을 의인화하여 비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권6에 계啓 15편, 제문 6편이 실려 있다. 계문으로는 〈사상주정서기소계謝尙州鄭書記紹啓〉 〈상이학사계上李學士啓〉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