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8년(경문왕 8) 12세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났고,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후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율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가 877년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 등을 담당한 공으로 879년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고, 890년에는 외지로 나가 대산군大山郡 천령군天嶺郡 부성군富城郡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려 정치개혁을 주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거하여 각지를 다니며 방랑하다가 908년 이후 생을 마쳤다.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다음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1926년 최치원의 후손 최국술崔國述이 여러 책들에 실린 최치원의 글들과 금석문에서 나온 것들을 모아 간행하였다. 책 머리에 노상직盧相稷의 중간서와 최국술의 편집서가 있고, 책 말미에 최왕교崔枉敎의 지識가 있다.
권1에는 부賦 시詩 표表 장狀 계啓 기記가 있다. 부는 〈영효詠曉〉 1수가 있고, 시에는 〈우흥寓興〉 〈촉규화蜀葵花〉 〈강남녀江南女〉 등 32수가 있으며, 표에는 〈신라하정표新羅賀正表〉 등 7편, 장에는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 등 6편, 계에는 〈상양양리상공양관급계上襄陽李相公讓館給啓〉 1편, 기에는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 등 3편이 있다.
권2~3에는 비碑 찬贊이 수록되어 있다. 비에는 〈무염화상비명봉교찬無染和尙碑銘奉教撰〉을 비롯하여 4편이 있고, 찬에는 〈순응화상찬順應和尙贊〉과 〈이정화상찬利貞和尙贊〉을 수록하고 있다. 이곳에 실린 글들은 《계원필경》과 《동문선東文選》, 불교관계 자료집, 금석문 등에 널리 흩어져 있던 것을 한데 모아 엮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