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의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를 거쳐 1360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 수찬修撰을 지냈다. 이후 관직으로는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 위위시승衛尉寺丞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 전농시승典農寺丞 예조정랑禮曹正郎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사예司藝 직강直講 사성司成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 예의사禮儀司 전법사典法司 판도사判圖司의 판서 삼사좌사三司左使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성계와 함께 여진정벌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여러 차례 명나라를 왕래하면서 외교 사신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전국에서 창궐하는 왜구를 토벌하는데도 공을 세우면서 공신에 올랐다. 고려 말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정도전 조준 등의 세력에 맞서 고려 왕조의 개혁을 통해 고려를 혁신할 것을 주장하면서 대립하다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되었다.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정몽주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9권 목판본으로 1677년(숙종 3) 영천에서 간행되었다. 책 머리에 권채權採 하륜河崙 박신朴信이 쓴 시권서詩卷序, 노수신盧守愼의 시집서詩集序, 변계량의 시고서時藁序, 송시열宋時烈의 중간서重刊序가 있고, 권 말미에 아들 정종성鄭宗誠의 시집발詩集跋, 유보柳溥의 신계개간발新溪開刊跋, 유성룡柳成龍의 문집발, 조호익曺好益의 시집중간발이 있다.
저자의 시는 호일豪逸하고 웅심雄深하다는 평과 함께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어오는 실정이며, 특히 중국 일본 등 외국에 여러 차례 내왕하여 외국인들과 서로 주고받은 시편은 당시 외교의 사실과 문화 교류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그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저자의 학문적 업적이 이와 같이 소략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지으면 모두 폐기해 버린 것도 있겠지만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참혹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나마 있었던 작품들도 대부분 유실되어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